본문 바로가기
문학

두려움 (당신의 체험)

by 마티아2002 2024. 9. 18.
반응형

신과 나눈 이야기 / 닐 도널드 월시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는 두려움이 이기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건 왜입니까?

두려움 속에서 살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너희는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고, 가장 강한 자가 승리하며, 가장 영리한 자가 성공한다고 들어왔다. 너희는 지고 한 사랑의 영광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당신은 내가 항상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을 선택한다면, 내가 누구고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 깨닫는 충만한 영광을 체험할 거라고 하셨는데?

모든 삶에는 단 하나이 목적만이 존재

이 목적의 경이로움은 그것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끝남은 일종의 한계인데, 신의 목적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

더없이 충만한 영광 속에서 자신을 체험하는 순간, 너희는 바로 그 자리에서 더 큰 영광이 실현되기를 꿈꿀 것이다. 체험이 깊어질수록 너희는 더 깊게 체험할 것이며, 깊게 체험할수록 너희의 체험은 깊어질 것이다. 거기에 내재된 가장 심원한 비밀은 삶이 발견의 과정이 아니라 창조의 과정이란 데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내려 애쓰지 말고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를 판단하도록 하라.(순간순간을 충만한 영광과 평화를 창조하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는 왜 여기 있죠?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 내고 재-창조하기 위해서. 사실 너희 스스로 ‘자신’을 창조해보지 않고서는 그 말을 믿을 수도 없으니까. 삶이란 너희가 이미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기회이다. 네 영혼이 지닌 유일한 갈망은 자신에 관한 가장 위대한 개념을 가장 위대한 체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당신 자신에 관한 당신의 체험이라고요?

태초에 ‘존재’는 존재했던 모든 것이었고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재 전체’는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존재 전체’가 곧 존재했던 모든 것이었고 그 밖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제 ‘존재 전체’는 자신이 이미 존재했던 모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더없는 장대함을 체험이 아닌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기에.(우리 인간도)

그러나 그것이 갈망한 것은 자신에 대한 체험이었다.‘존재 전체’는 비(非) 존재가 없이는 장대함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비존재가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존재 전체’가 알았던 단 한 가지는 자기 말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기 외부에 있는 어떤 준거지점에 비추어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준거점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오직 단 하나의 준거점만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유일한 거점, 즉 “존재-부재”, ‘있음-없음’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인 전체’는 체험으로 자신을 아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이렇게 하려면 내부의 준거점을 이용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의 어떤 부분도 필연적으로 전체보다 못한 게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단순히 자신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기만 해도전체보다 못한 각 부분은 자신의 나머지를 돌아보고 그것의 장대함을 목도할 수 있으리라는, 아주 정확한 추론을 내렸다. 이제 신은 “여기” 있는 것과 “저기” 있는 것을 창조하여, 신 스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내부로부터 일어난 이 엄청난 폭발의 순간에 신은 상대성을 창조했으며 그것은 일찍이 신이 자신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따라서 관계는 신이 일찍이 너희에게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절대존재의 보이는 부분들이 자신들을 서로 “관련된” 것으로 정의하기 시작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 역시 그렇게 했다. 신은 사랑이 존재하려면, 또 자신을 순수한 사랑으로 인식하려면 그것의 대립물도 존재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신은 자진해서 그 위대한 극단, 사랑의 절대 대립물, 곧 사랑이 아닌 모든 것, 오늘날 두려움이라 부르는 것을 창조했다. 두려움이 존재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사랑은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나를 나눈 것은 나 자신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 줄 내 부분들을 충분히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주임을 체험으로 아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 무수한 부분들 각각에게(내 영적인 자식들 모두에게) 전체인 내가 갖고 있는 창조력과 똑같은 창조력을 부여해 줬다. 너희의 여러 종교가 너희는 신의 “형상대로, 신과 닮은 꼴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간단해 보이지만, 더 들어가면 아주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너희가 자신을 나로 인식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방법은, 우선 너희 자신을 나 아닌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뭔가를 안다는 것과 그것을 체험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영혼은 자신을 체험으로 알고자 갈망했다(내가 그랬던 꼭 그대로!). 개념으로 안다는 것만으로는 너희에게도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온 우주에서 가장 비범한 착상이며 가장 빛나는 합작품이다.

내가 여기서 합작품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너희 모두가 나와 더불어 그 계획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계획하에서, 순수 영혼인 너희는 이제 막 창조된 물질 우주로 들어가게 된다. 물질성이야말로 너희가 개념으로 아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해주는 유일한 길이기에. 내 영적 자식들인 너희가 일단 물질 우주로 들어가면, 너희는 자신에 관해 아는 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너희는 그 대립물을 알아야 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