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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신은 왜 불행과 재난을 창조했는가? (대립물)

by 마티아2002 2024.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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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나눈 이야기 / 닐 도널드 월시

신은 왜 개인의 극심한 불행과 전 세계의 재난을 창조했는가?

나는 너희 주변에 너희가 완벽함이라 부르는 것만을 창조하여 내 선함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미 설명했다시피 너희는 사랑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 때까지는 사랑을 증명할 수 없다. 절대계를 제외하고는 대립물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절대계 속에는 앎만 있을 뿐 체험은 없다. 앎은 신성한 상태이지만 가장 위대한 기쁨은 존재 속에 있다. 존재는 오로지 체험한 뒤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을 순서대로 펼쳐 놓으면 앎, 체험, 존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성삼위일체’ ‘삼위일체’인 신이다. 성부(聖父)는 모든 이해의 부모요, 모든 체험의 원천인 앎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부(聖父)는 모든 이해의 부모요, 모든 체험의 원천인 앎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자(聖子)는 아버지가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의 체현 또는 육화(肉化 embodiment)인 체험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존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신(聖神)은 아들이 그 자신에 관해 체험한 모든 것의 탈육화(脫肉化 disembodiment)인 존재다. 그것은 오직 알고 체험한 것에 대한 기억을 가질 때만 가능한, 소박하면서도 절묘한 있음 is-ness이다. 이 소박한 있음은 더없는 기쁨이다. 그것은 알고 체험한 뒤에 오는 신의 상태이며, 신이 태초에 갈망했던 상태이다.

존재하는 어떤 것도 대립물을 갖지 않는다.

삶의 모든 조악한 관계들에서는 이 삼위일체 진리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조악한 관계들은 언제나 2개 조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왼쪽-오른쪽과, 위-아래, 크다-작다, 빠르다-느리다, 덥다-춥다, 그리고 일찍이 창조된 것 중에서 최대의 쌍인 남성-여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쌍들에는 사이라는 게 전혀 없다. 모든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나, 이 양극단 중 어느 하나의, 더하거나 덜한 변형(變形) 일뿐이다. 조악한 관계들의 영역에서는, 어떤 개념도 그 대립물의 개념화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너희의 일상 체험 대부분이 이런 현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미묘한 관계들의 영역에서는, 존재하는 어떤 것도 대립물을 갖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 원을 그리며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나아간다. 병은 건강의 대립물로, 너희 명령에 따라 너희의 현실에서 드러난다. 어떤 수준에서든 너희가 자신을 아프게 만들지 않았는데 아파질 수는 없으며, 건강해지기로 그저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한순간에 좋아질 수 있다.

개인의 극심한 불행은 그 개인 스스로 선택한 방응이며, 전 세계의 재난들은 세계의식의 결과이다. 너희의 질문에는 이런 사건들을 선택한 게 나(神)이고, 내 의지와 바람 때문에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사건들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 나는 그저 너희가 그렇게 하는 걸 관조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건들을 막을 일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너희 의지를 방해하는 것이고, 너희의 신 체험, 곧 너희와 내가 함께 선택한 체험을 도로 빼앗는 것이 되기에.

어떤 것도 비난하지 마라.

그러니 너희가 세상에서 나쁘다고 말하는 어떤 것도 비난하지 마라.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너희가 그것의 어떤 면을 나쁘다고 판단했는지, 그리고 정녕 나쁘다면 그것을 바꾸기 위해 뭘 하고 싶은지 물어보라. 외부가 아니라 내면을 향해 이렇게 물으면서 생각해 보라.

“지금 이런 재난을 당하면서 나는 자신의 어떤 부분을 체험하고자 하는가?

나는 존재의 어떤 측면을 불러내고자 하는가?”

왜냐하면 삶의 모든 것은 너희 자신의 창조 도구일 뿐이며, 삶의 모든 사건은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자신’이 될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행성을 걸었던 모든 위대한 선각자들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희가 그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간에,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지 않은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그들 중 다수가 진실로 박해받았는데도 말이다.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옛날에 자신이 빛인 걸 아는 한 영혼이 있었다. 그리하여 작은 영혼은 전체에서 자신을 떼어냈으며, 거기다 또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는 일까지 해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이 영역에서 자신의 체험 속으로 온갖 종류의 어둠을 불러들이는 힘을 행사하여 그것들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 영혼은 더없이 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쳤다.

“아버지시여,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너희가 가장 암담한 순간에 소리치듯이 그렇게.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너희를 버린 적이 없다. 나는 항상 너희 곁에 서 있다. 늘 변함없이 ‘참된 너희’를 기억시킬 채비를 갖춘 채, 너희를 집으로 불러들일 채비를 갖춘 채.

그러므로 어둠 속에 존재하는 빛이 돼라. 하지만 어둠을 저주하지 마라. 그리고 너희가 자기 아닌 것에 둘러싸인 순간에도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고, 그 같은 창조를 이룬 자신을 칭찬하라. 너희가 그걸 변화시키려고 애쓸 때조차도. 그리고 가장 큰 시련의 순간에 행하는 것이 최대의 성공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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