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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사피엔스 - 기독교와 일신교. 이신교. 다신교

by 마티아2002 2024.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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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예배와 재물과 가축의 피를 받는다면 우리에게 비, 건강, 승리, 성공을 내려주실 수 있었다. 하지만 동일한 신을 믿는 국가끼리 전쟁을 할 때 전지전능하신 신은 어떤 기준으로 승리의 영광을 주시는지? 동일한 신을 믿는 신자가 동일한 대학의 동일한 학과에 진학을 원할 때 전지전능하신 신께서는 누구의 진학을 선택해 주시는지? 궁금하다.

 

갠지스강 유역의 수렵채집인 무리는 유달리 큰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베지 못하게 하는 규칙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나무의 정령이 노해서 복수하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다. 인더스강 유역에 살았던 또 다른 수렵채집인 무리는 흰 꼬리여우의 사냥을 금지했을지 모른다. 언젠가 흰 꼬리여우가 부족의 현명한 노파에게 귀중한 흑요석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과 일신교

농업혁명이 미친 최초의 종교적 효과는 동식물을 영혼의 원탁에 앉은 동등한 존재에서 소유물로 끌어내린 것이다. 고대 신화의 많은 부분은 실상 인간이 동식물을 지배하는 대가로 신들에게 영원히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담은 법적인 계약이었다. 창세기의 첫 몇 장이 대표적 예다. 농업혁명 이래 수천 년간 종교의 예배는 주로 인간이 신에게 양과 포도주, 케이크를 바치고 그 대가로 풍성한 수확과 가축의 다산을 약속받는 것이었다.

 

인간은 신들에게 탄원할 수 있었고, 신들은 예배와 제물을 받는다면 황송하게도 비, 승리, 건강을 내려주실 수 있었다. 수도에 있는 왕이 위대한 전쟁의 신에게 수십 마리의 살찐 양을 제물로 바치며 야만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동안, 오두막에 있는 농부는 촛불을 켜고 무화과나무의 요정에게 병든 아들을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

 

우리의 기도와 희생과 죄업과 선행이 생태계 전체의 운명을 결정했다. 멍청한 사피엔스 몇 명이 신들을 노하게 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끔찍한 홍수가 닥쳐와 수십억 마리의 개미와 메뚜기, 거북, 영양, 기린, 코끼리를 쓸어버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다신교는 신들의 지위뿐 아니라 인간의 지위도 격상시켰다. 옛 애니미즘 체계에 속하던 다른 불운한 존재들은 지위를 잃고, 인간과 신의 관계라는 위대한 드라마에서 엑스트라나 말없는 장식물로 전락했다.

 

일신교와 다신교

일신교와 구별되는 다신교의 근본적 통찰에 따르면,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 권력은 관심이나 편견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의 평범한 욕망이나 근심 걱정에 개의치 않는다. 이 권력에게 전쟁의 승리나 건강, 비를 요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위치에서 보면, 특정 왕국의 승리나 패배, 특정 도시의 번영이나 쇠퇴, 특정인의 회복이나 사망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운명의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았고, 힌두교도들도 아트만을 위한 사원을 짓지 않았다.

 

우주 최고 권력에게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욕망을 버리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다 끌어안고 패배나 가난, 질병, 죽음까지도 끌어안는 것이다. 그러므로 힌두교에서 성자나 고행자로 알려진 일부 신자는 자신의 삶을 아트만과의 합일을 위해 바치며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이들은 그런 근본원리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려고 애쓰며, 영원한 관점에서 볼 때 평범한 모든 욕망과 두려움은 무의미하며 덧없는 현상임을 인식하려 애쓴다.

 

다신교의 통찰은 폭넓은 종교적 관용을 낳기 쉽다. 다신교도들은 한편으로는 하나의 최고 권력, 완벽하게 무심한 권력을 믿고 다른 한편으로는 편견을 지닌 수많은 권력을 믿기 때문에, 하나의 신에 헌신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신들의 존재와 효험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다. 다신교는 본질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으며 ‘이단’이나 ‘이교도’를 처형하는 일이 드물다. 다신교도는 심지어 거대한 제국을 정복했을 때도 피정복민을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제국 내의 모든 피정복 민족은 제국의 신과 의례를 존중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들 신과 의례가 제국을 보호하고 정당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지역 신과 의례를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진 않았다. 아즈텍 제국에서 피정복민들은 우이칠로포치 틀리 신전을 지어야 했지만, 기존의 지역 신전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그 옆에 세웠다.

 

로마 제국과 기독교

다신교인 로마 제국은 기독교인들에게 신앙과 의례를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수호신과 황제의 신성에 경의를 표할 것을 기대했다. 이는 정치적 충성심의 선언으로 여겨졌다. 기독교인들이 이를 격렬하게 거부하고 화해를 위한 모든 시도를 거절하는 데까지 나아가자, 로마인들은 정치적 전복을 꾀하는 세력이라고 보아 박해로 대응했다.

 

3세기에 걸친 모든 박해의 희생자를 다 합친다 해도,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몇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후 1,500년간 기독교인은 사랑과 관용의 종교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기독교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

 

1572년 8월 24일, 선행을 강조하는 프랑스 가톨릭교도들은 하느님의 인간 사랑을 강조하는 프랑스 개신교 공동체를 공격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로 불리는 이 공격에서 5천~1만 명의 개신교도가 살해되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로마 교황은 프랑스에서 전해진 소식을 듣자 몹시 기뻐하며,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축하 기도회를 조직하고 조르조 바사리에게 명해 바티칸의 방 하나를 대학살에 대한 프레스코로 장식하게 했다.

 

그들은 자신의 신이 유일신이며, 그분이 우주의 최고 권력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분이 여전히 사심과 편견을 지닌 것으로 보았고, 우리가 그분과 거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해서 일신교가 태어났다. 그 신도들은 병에서 회복되도록, 복권이 당첨되도록,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해달라고 우주의 최고 권력에게 간청했다.

유대교는 우주의 최고 권력은 사심과 편견을 지니는데, 그분의 주된 관심은 조그만 유대국가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모를 땅에 있다고 주장했다. 유대교는 다른 나라에게는 이 믿음을 권하지 않았고, 그 존속기간 대부분 동안 선교를 하지도 않았다. 이 단계를 우리는 ‘지역적 일신론’ 단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

성 세인트.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은 1572년 8월 24일 파리에서 일어난 프랑스 종교 전쟁의 중요하고 잔인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학살은 프랑스 위그노(개신교)를 대상으로 했으며, 16세기 유럽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 갈등 중 가장 악명 높은 사건 중 하나로 간주됩니다.


프랑스는 다수의 가톨릭교와 소수의 위그노 개신교 사이의 종교적 긴장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러한 긴장은 1562년에 시작되어 1598년까지 지속된 프랑스 종교 전쟁으로 알려진 일련의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갈등을 완화하려는 한 가지 시도는 찰스 왕의 가톨릭 누이인 발루아의 마가렛의 결혼이었습니다. 1572년 8월 위그노 지도자 나바라의 앙리(훗날 프랑스의 앙리 4세가 됨)에게 결혼은 두 파벌 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많은 강경 가톨릭 신자들은 이 연합에 분노했습니다. 결혼식이 있은 지 불과 며칠 뒤 저명한 위그노 지도자이자 왕의 측근 고문이었던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목숨을 노리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위그노의 보복을 두려워한 캐서린 드 메디치 왕비를 포함한 왕실 구성원들은 젊은 국왕 찰스 9세에게 위그노가 권력을 장악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확신시켰습니다.

1572년 8월 23~24일의 밤, 위그노 지도자들의 표적 암살로 시작된 이 사건은 개신교에 대한 광범위하고 통제되지 않은 학살로 바뀌었습니다. 학살은 파리에서 시작됐지만 곧 프랑스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됐다. 그 후 며칠 동안 폭력과 반개신교 정서에 선동된 가톨릭 폭도들은 수천 명의 위그노들을 추적하여 살해했습니다. 사망자 수에 대한 추정치는 다양하지만 5,000~30,000명의 위그노가 이번 학살로 사망했으며 파리에서는 최악의 폭력사태를 목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위그노의 집과 사업체가 약탈당했고 가족 전체가 몰살당했습니다.

이 학살은 개신교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프랑스와 그 외 지역의 가톨릭교인과 개신교인 사이에 불신과 적개심을 더욱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온건파 위그노들이 화해의 희망을 포기하고 무장 저항을 재개하면서 이는 프랑스 종교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학살은 유럽 전역, 특히 개신교 국가에서 프랑스의 명성을 손상시켰습니다.


일시적으로 천주교로 개종하여 가까스로 학살을 면한 나바라의 앙리는 1589년에 결국 프랑스의 앙리 4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천주교로 개종하고 1598년 낭트 칙령을 발표함으로써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전쟁에 참여하여 위그노에게 제한된 종교적 관용을 부여했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은 유럽 역사상 가장 암울하고 악명 높은 종교적 폭력의 장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기독교와 만신전

이론상으로는 우주의 최고 권력이 사심과 편견을 지닌다고 일단 믿는다면, 부분적 권력을 숭배해 봐야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대통령 집무실의 문이 열려 있는데 하위관료를 찾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사실 일신론 신학은 최고신 이외의 모든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감히 그런 잡신들을 믿는 자에게는 지옥불과 유황을 퍼붓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신학 이론과 역사적 실재 사이에는 늘 틈이 있기 마련이었다.

기독교는 성자들로 구성된 나름의 만신전을 발달시켰는데, 이것은 다신교의 만신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영국은 성 조지의 수호를, 스코틀랜드는 성 안드레의 비호를 받았다. 헝가리는 성 이슈트반, 프랑스는 성 마르탱이 수호했다. 도시와 읍, 전문직, 심지어 질병에도 자신만의 성인이 있었다. 밀라노는 성 앙브루아즈의, 베네치아는 성 마가의 보살핌을 받았다. 성 엘모는 굴뚝 청소부들을 보호했고, 성 마태오는 괴로워하는 세금 징수관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두통이 있다면 성 아가티우스에게 기도해야 하지만, 치통을 앓는다면 성 아폴로니아가 훨씬 더 잘 맞는 기도 대상이었다.

 

다신교와 이신교

다신교는 일신교만 낳은 것이 아니라 이신교도 낳았다. 이신교는 서로 반대되는 두 힘의 존재를, 즉 선과 악을 믿는다. 일신교와 달리 이신교에서 악은 독립적인 힘이다.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그 신에 종속된 것도 아니다. 이신교는 온 세상을 이들 두 힘의 전쟁터로 본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싸움의 일부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할까? 왜 고통이 존재할까?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일신론자들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려면 지적인 곡예를 부려야만 했다. 전지전능하며 완벽하게 선한 하느님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널리 알려진 하나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는 신의 방식이라고 했다. 악이 없다면 인간은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으므로 자유의 지도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 인물이 자유의지로써 악을 선택하고 그 결과로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신이 미리 알았다면, 신은 왜 그를 창조했을까? 만일 세상에 두 대립되는 힘인 선과 악이 있다면, 둘 사이의 싸움을 관장하는 법칙을 정한 존재는 누구인가? 수없이 많은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교인이 강력한 악의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이 악마로 부르는 것이 그런 존재다. 이 존재는 선한 신에 대항해 독자적으로 싸울 수 있고, 신의 허락 없이 파괴를 불러올 수 있다. 일신론자가 어떻게 그런 이신론적 신념을 품을 수 있을까(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것은 구약에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선과 악의) 대립은 결국 기독교와 무슬림 사상의 초석이 되었다. 천국(선신의 영역)과 지옥(악신의 영역)에 대한 믿음 역시 그 기원은 이신론에 있었다. 구약에는 이런 믿음의 흔적조차 없다. 사람들의 영혼이 육체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 산다는 주장 또한 전혀 나오지 않는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지음 / 조현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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